미국 테러 사건 뒤집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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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진실찾기
- 작성일 : 2001-09-14
- 조회 : 4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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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대신 세계 각지에서 불러들인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땅을 집어주며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환희에 찬 유대 이주민’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난민’. 당시의 그 극명했던 불법과 부도덕을 바라보면서도 ‘지긋이’ 눈을 감았던 국제사회를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침략은 팔레스타인의 피가 흐르는 내게 ‘해방운동’을 명령했다. 침략자 이스라엘은 해방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했고 심지어 어린이와 여성들이 피난한 난민촌마저도 집중 공격의 목표물로 삼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 내부는 또 내부대로 썩어갔다.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술과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늘어만 갔다. 이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과 섹스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끄나풀이 되거나 정보원 노릇을 했다. 자신들의 조국이, 자신들의 형제가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판에.
여기서 나는 회교에 충실한 회교도의 정신 속에서 ‘성전’의 논리를 발견했다. 회교에서 가르치는 자기희생, 이건 바로 조국해방과 침략자 축출을 위한 투쟁 속의 ‘순교’였다. 신은 우리들의 희생을 허락할 것이며 결국 희생자들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나는 측근들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무장항쟁과 대중투쟁을 하나로 묶어 적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 그 결과,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1987년 12월14일,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대형집회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메드 야신(Ahmed Yassin·하마스 최고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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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
팔레스타인의 땅과 성지를 강제로 점령한 채,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쫓아내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킨 이스라엘의 침략 앞에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대안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나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이래 오늘 2001년 4월까지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왔으나, 그동안 우리가 제의했던 어떤 형태의 대안이나 정책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추구해왔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은 모두 강자의 논리 앞에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모든 평화적인 노력은 온데간데 없이 내게 남은 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이 붙여준 ‘테러리스터’란 별명뿐이다.
테러리스터라? 이 ‘거룩한’ 별명이 내게 적합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난 김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 삶의 철학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을 ‘엄격’과 ‘관용’의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온건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그 지원세력들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또는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그 답은 간단하다.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 내 개인만을 놓고 볼 때도, 나는 법적 권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그 땅의 주인이다. 만약 외국의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다면? 그래서 당신은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는데, 누가 당신을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부른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조국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불러야 옳은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나는 그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는 칭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누가 외적의 침입을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며 ‘관용’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침략했을 때,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터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부르고 있는가. 왜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만 유독 국제사회에서는 테러리스터의 난동이라 불려야 하는가. 자유와 독립을 시민권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어떻게 이런 희한한 호칭을 팔레스타인에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다.
“누가 테러리스터고 누가 희생자인가.”
이 간단한 걸 구분하지 못하는 인류가 과연 그 복잡한
21세기의 평화 철학을 말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500만 팔레스타인 시민 가운데 400만명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에 의해 국외로 쫓겨난 이 현실이 아직도 부족해서?
아니면, 핵무기와 신경가스, 미사일과 최신예 폭격기를 지닌 이스라엘군 무장상태가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민에 비해 여전히 신통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국과 유럽은 이스라엘을 ‘희생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공격자를 희생자로 치켜세우고 희생자를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이 일그러진 국제사회의 이성이 적어도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국제연합, 이것도 한통속이었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 노예의 복종을 강요했을 뿐이다. 국제연합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 주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에 손찌검을 해왔는데, 유독 이스라엘만은 손을 보지
않았다. 국제연합의 모든 결정을 파기시켜온 그 이스라엘만은 온전하게 보호받아왔다는 말이다.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까무러칠 만큼 두들겨맞았던 이라크나 유고처럼 또는 리비아나 수단처럼 왜 이스라엘은 응징을 당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길 때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징벌 대신 최신무기를 안겨주며 오늘날 이스라엘을 중동 최고무장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게 팔레스타인이 보는 국제사회의 ‘정의’, 바로 그 정확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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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어설픈 휴머니즘을 경계한다
2001.9.13.목요일
딴지 특별취재반
신의 도시에 엄청난 뇌성이 있을 것이고,
두 형제는 카오스로 인해 무너진다.
성채가 견디고 있음에도 위대한 지도자는 굴복하며
큰 도시가 불탈때 세번째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In the City of God there will be a great thunder
Two brothers torn apart by Chaos,
while the fortress endures, the great leader will succumb,
The third big war will begin when the big city is burning.
아아 두려운 일이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몇백년전에 했다는 예언이 2001년에 벌어지다니... 두 형제(쌍둥이빌딩)가 진짜로 무너졌으니 이제 3차대전이 시작되는가... 아아..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해외로 토낄 것인가, 예비군 군복을 다리며 차분한 마음으로 삶을 정리해볼 것인가, 아니면 사과나무 묘목이라도 얼른 사다가 심을 것인가....
그런데. 그거 아시남?
저 시는 개뻥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저 가짜 시는 사고 직후에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여 폭발적인 기세로 널리 알려진 이메일에 담겨 있던 내용으로,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뿐인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느니, 수뇌부는 다 알고 있었는데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조했다느니, 등등의 음모론도 미국에 팽배해 있다.
졸라 우습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미국넘들이 뭔 일만 생기면 노스트라다무스를 들먹이고, 각종 음모론과 미신이 난무한다. 사건 사고 많고 감춰진 성역이 많은 우리나라도 정감록이나 음모론으로 저렇게 난리치지는 않는다.
본우원, 엑스파일의 광팬이며 노스트라다무스 책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어봤고 달착륙 구라설은 남들보다 몇 년 일찍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냉혹한 국제질서에 어설픈 음모론이나 미신의 설 자리는 없다.
그럼 미국 국민들이 유치하고 의심많고 나약해서 저런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 국민들이 바보같아서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 자체가 그렇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는 말부터가 딱 그렇다.
선과 악의 이분법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진 그날 밤,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명, 그리고 자유 그 자체가 고의적이고 치명적인 테러로 공격받았습니다. [중략] 사악하고 비열한 테러행위로 수천의 생명이 갑자기 끝난 것입니다.
이러한 대량살상 행위는 우리 나라를 혼돈과 퇴보로 몰아 넣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합니다. 위대한 우리 국민은 위대한 국가를 지켜왔습니다. [중략]
미국이 공격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밝은 자유와 기회의 횃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빛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악함, 인간 본성 최고의 악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최고의 선으로 응답했습니다. 인명구조자들의 용기, 헌혈과 도움으로 낯선 사람들을 보살피는 따뜻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중략]
오늘밤 나는 슬픔에 잠긴 모든 이들, 자신의 세상이 파괴된 모든 어린이들, 안정과 안전을 위협받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23장 4절)" 모든 이들이 이 성경구철처럼 어떤 위대한 힘에 의해 위안받길 나는 기원합니다.
오늘은 모든 미국인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단호한 결의를 한 날입니다. 미국인들은 전에도 적을 물리쳐왔으며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린 누구도 이날을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 세계의 자유와 선과 정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Thank you. Good night and God bless America. (영어 전문보기)
한 마디로 줄이면 이렇게 되겠다. “자유와 기회와 선과 정의를 대변하는 미국이 악(evil)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미국이 공격받은 이유는, 미국이 가장 밝은 자유의 횃불이기 때문에 비문명과 야만세력의 음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절라 유치찬란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그냥 정치적인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주 감동적이고 비장하게.
미국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 이건 정말 부럽다. 솔직히 부럽다. 미국넘이 하나 다른 나라에 납치라도 당하면 미국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난리를 떤다. 자국민 보호, 이거 무서워서 다른 나라는 미국넘들 함부로 못 건드린다. 우리로선 열받는 일이긴 하지만 주한미군 범죄에 대처하는 그넘들의 짓거리를 보라.
그러나 또 동시에 그들의 우월감이 오만함으로 이어지도 한다. 이건 단순히 자기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고 힘이 세다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선”이다. 자유와 인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사도이며, 문명의 빛을 비문명에 전파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월감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며 이데올로기다. “람보”를 보면서 유치하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이 딱 그렇다. 미국 대중의 수준은 딱 그정도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세계 무력지배는 그 “미국 이데올로기”로 치장된다. 미국의 질서에 따르지 않으면 깡패국가 (rouge country)이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이고, 심지어는 악이니 반문명이니 하는 거의 종교적인 색채로 덧씌워진다. 부시가 연설에서 괜히 성경을 인용한 게 아니다. 미국에서 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손에 화염병을 든 과격분자에다, 자살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광신도들이며, 문명과 이성의 세계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그들은 광신도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에 못지 않게 미국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들이다.
물론 이번 비행기 테러와 같은 무차별 살상은 악이다. 그런 식의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고,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자동으로 미국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악과 싸우는 것은 또다른 악일 수도 있다. 아니 선이니 악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국제관계에서 뭔 의미가 있단 말인가?
누구의 휴머니즘인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번 테러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고 한다. 사람 만명 죽은 걸 고소해하면서 기뻐 날뛰는 게 제대로 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되어 20만명이 죽었을 때 우리 민족은 환호했다. 20만명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애들이 싸그리 죽어 자빠졌을 때, 그래서 일본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했을 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에서 춤을 췄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기뻐한 것과 한국인들이 그 당시 기뻐한 건 다른 문제라구?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1945년 이차대전 말미 독일의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연합군은 쑥대밭을 만들었다. 800대의 폭격기로 이틀간 흔적없이 밀어 버린 것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드레스덴을, 인구 35만 중 10만명을 죽이고 건물 몇 개 달랑 남을 정도로 허허벌판으로 밀어 버리면서, 노인과 여자와 애들만 바글바글한 아기자기한 도시 하나를 때려 부수면서 연합군 측과 국민들은 고소해했다. 독일의 자존심을 꺾어 버렸다면서. 군사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독일의 상징과 자존심을 꺾는 게 중요했을 뿐.
이번에 미국의 자존심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타겟이 된 것도 똑같은 이유였다.
독자제위나 본우원이나, 우리는 다같이 폭력에 분노한다. 처자식 먹여살리는 것, 출세하는 것 밖에는 관심도 없던 애꿎은 사람 일만명을 일거에 죽인 폭력에 분노하며, 단 10분 전까지도 퇴근 후 데이트할 궁리하던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뻔히 죽는 줄 알면서도 까마득한 아래로 우수수 뛰어내리게 만든, 그 엄청난 폭력에 전율을 느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던 비행기 승객들, 고단한 일상에 지친 그들을 선택의 여지없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힘에 분노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 분노의 대상은 누구인가? 분노의 똥침을 맞고 길바닥에서 게기적거리며 죽어자빠져야 할 인간은 누구인가?
20만을 죽인 핵폭탄에 분노한다고 해서 일본 편을 들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일본도 똑같이 핵폭탄을 개발중이었고, 미국이 아니었더라도 일본이 먼저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테러도 마찬가지다. 비행기 테러에 분노한다고 해서 무조건 미국 편에 설 수는 없다.
어설픈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칼기 폭파범 김현희에 대한 휴머니즘이 도대체 휴머니즘인가? 어설픈 휴머니즘은 오히려 거꾸로 폭력을 정당화할 할 수도 있다.
죽어간 미국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의 절반이라도 걸프전 때 죽어간 20만 이라크인들에게 느꼈더라면, 그 반의 반만이라도 지금까지 죽어간 1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쏟았더라면, 그리고 중동에 다시 전쟁의 불길을 지핀 부시 행정부에게 지금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분노했더라면, 오늘의 이 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
98년 미 대사관 테러에 대항해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의 제약공장을 모조리 때려부쉈다. 확인된 집계는 없지만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어느 누구나 다 자신의 정당성이 있다. 누구의 휴머니즘이 진정한 휴머니즘인가?
얼마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 한 명을 그가 앉아있는 빌딩 집무실로 헬기에서 미사일을 쏴 죽였다. 폭탄을 터뜨려 죽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미사일에 “맞아죽게” 했다. 그것을 미국과 한국의 언론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라고 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며 폭탄을 안고 돌진하는 것은 “자살테러”라 했다. 그때 그 언론 문구를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아랍의 테러세력들을 비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티비에서 스펙타클하게 죽어가는 미국인들에게 가지는 어설픈 휴머니즘은 지금까지 미국이 행사해 온, 혹은 미국이 앞으로 행사할, 더 엄청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폭력은 자신이 폭력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폭력은 언제나 휴머니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리고 때로는 “자유”와 “평화”와 “기회”와 “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저 위 부시의 연설처럼.
중동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본우원, 반미하자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아랍이라고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재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해서 본지는 지난기사에서 분명히 그 말도 안되는 학살행위를 규탄한 바 있다.
미국이냐 아랍이냐 둘중 한쪽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쪽이 악이라고 다른쪽이 선이라는 유치한 이분법을 써먹는 데는 우리나라에 딱 두 군데밖에 없다. 어린이용 만화영화, 그리고 빨갱이를 증오하는 좃선일보.
하고 싶었던 말은, 티비와 신문을 보면 온통 우리 눈을 뒤덮는 그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 입이 떡 벌어지는 그 장면들에 너무 지나치게 경도되지 말자는 것이다. 뜨거운 가슴이 휴머니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 왜냐하면 이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로 미국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도 고통을 받을 것이고, 남북관계도 앞으로 어떻게 꼬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과 아랍의 관계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태의 계기가 된 부시의 안하무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발언할 권리가 있고, 중동문제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에 너무나 무지하다. 중동문제 전문가 이름 한 사람만 대 보라. 이런 거에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정치인 이름 한 사람이라도 대 보라. 우리는 왜 이리 폐쇄적이고 폭이 좁은가?
CNN만을 주구장창 내보내는 티비, 친미 친유대 일변도인 우리나라 언론은 대한민국의 국익을 해치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가 남의나라 미국의 꼴통짓에 덩달아 날뛰고 그 피해를 봐야 하는가? 사고 후 뉴욕 맨하탄에서는 유태인들이 공공연히 자기네 빵떡모자를 쓰고 삼삼오오 거리를 몰려다닌다는 본지 통신원의 소식이 들어오고 있다.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유태인들이 꽉 잡고 있는 나라이고, 유태인들의 폐쇄성은 한민족을 뺨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이제 어디라도 애꿎은 희생물을 타겟삼아 폭탄을 쎄려부을지도 모른다. 기울어져가고 있는 미국 경제의 타개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보복과 응징이라는 명분 아래. 왜 우리가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춰야 하는가?
(주 -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이번 테러의 상관관계, 전쟁과 미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다 다룰테니 좀 기둘려 보시라)
또하나, 한 나라가 강경 우익으로 치달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목하 목도하고 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이다. 우익의 목소리가 균형있게 드러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이 강경 일변도로 나갈 때, 한 나라를 강경 우파들이 좌지우지 할 때.... 지나치게 강한 것은 부러진다는 거, 동서고금의 진리 아니겠남?
좃선을 비롯한 재래 언론들이 “깡패국가 테러국가 북한을 더 옭죄어야 한다”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허긴, 남북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꼴통 우익들이 비판받으면 비판받을수록, “우리끼리 좌우대립이 격화되어 냉전이 심해지고 있다”고 써제끼는 넘들이니 별 기대는 않는다만, 이래도 배우는 게 없다면 걔네들은.... 구제불능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가족들 때매 철렁했던
딴지 편집장 최내현 (asever@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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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응어리가 대체 무엇이길래
미국 테러당할 때 일부 아랍인은 왜 환호했나
이희수 기자 ohmynews@ohmynews.com
레바논 남부에 거점을 둔 하마스 본부에는 항상 자살특공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폭탄을 안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이 몰려들고 있다. 단순한 종교적 광신일까? 무지몽매한 자들의 야만성일까?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미국심장부에 대한 항공기 폭파 테러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일까? 왜 그들은 미국을 향해 그렇게 무모한 도발을 계속 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응어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반미 응어리의 태동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땅에 '위대한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아랍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2천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들의 승리에 세계는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 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분노했다. 그리고 조국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2천년간 평화롭게 살아온 조상들의 땀과 피가 어린 땅이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한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정책은 유럽인들의 죄과였다. 그런데 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질렀던 죄의 대가를, 아무런 인과관계나 역사적 책임이 없는 아랍인들이 대신 치르도록 했는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을 향한 지울 수 없는 응징의 원한이 뿌리를 내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힘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때부터 오히려 자신들이 난민이 되어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한 가지,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꿈은 산산조각나 버렸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고토 회복은커녕, 기존의 아랍 영토마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 지역의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를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지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해 왔기 때문이다.
현실과 타협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이미 이스라엘이 핵을 가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현실에서 조국을 되찾는 꿈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중재하여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점령한 땅에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수립해주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신 팔레스타인은 헌법을 바꿔 이스라엘 탈환을 포기하게 하고 국가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지난 50년간 조국 되찾기에 헌신했던 많은 강경 세력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받아들인 대다수 온건 아랍인들을 이 길을 선택했다. 전쟁에 지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양보이고 생존의 게임이었다.
그것이 1993년의 오슬로 평화혁명이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국제사회는 모처럼의 화해와 공존의 틀에 박수를 보냈고 그 당사자들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희망의 포기
그러나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서 일부 팔레스타인 반대세력들의 테러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강경 정권은 자국안보를 들어 평화협정 자체를 무력화시켜버렸다. 나아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통해 자국 영토화를 꾀하고 군대를 동원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꿈을 무산시켜 버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부시 정권은 미사일과 팬텀기를 동원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지원하거나 수수방관했다. 평화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듯이 보였다.
최근에는 조직적인 요인암살 계획에 따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지도자를 포함한 강경파 지도자들이 차례로 사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이 시온주의를 인종차별 이념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열의를 무시하고 미국은 남아공의 더반에서 열린 인종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이슬람권에게 극도의 불신감과 배신감을 심어주었다.
겉으로는 세계평화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일방적 가치를 강요하고 이중잣대로 이슬람세계를 유린하는 미국에게 강경파들은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했다.
무장된 테러와 몸을 던지는 테러 사이에서
그들은 분노했다. 기회와 선택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온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목숨을 내놓았다. 항공기를 몰고 미국을 향해 응징의 도전을 한 셈이다.
하지만 리비아, 이란 같은 반미국가는 물론 지하드, 하마스, 헤즈볼라 같은 과격 이슬람단체들도 한결같이 미국에 대한 이번 테러를 비난했다.
그들은 왜 스스로 테러를 행하면서 왜 이번 테러를 동시에 비난해야 하는가? 그것은 민간인을 담보로 한 테러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비난받아야 할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전투기를 동원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민간인 학살도, 국가 테러로 규정하면서 중지되거나 응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 이들은 미국이 일관된 정책과 모두에게 공유되는 가치기준을 적용하기를 원한다.
핵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핵사찰의 예외임을 묵인하면서 적대관계에 있는 인근 아랍국가들의 자위 개념의 핵 시설은 물론 사소한 화학무기 프로젝트까지 철저히 파괴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아랍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던지는 절규
무고한 미국 시민들이 희생당한 참혹한 테러현장에서 서방세계가 경악하고 분노와 슬픔을 보이고 있을 때, 아랍전사들은 지난 50년간 이스라엘의 테러로 숨진 수만 명의 형제와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있다. 그러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미국 시민들의 아픔을 아랍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의 매일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랍인들의 일반적인 성향이 반미를 깊이 깔고 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과격 테러리스트 집단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절대다수는 폭력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갈구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한, 대립보다는 화해를 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의 과도한 보복공격이나 엄청난 민간인의 희생이 따르는 폭격은 또 다른 테러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테러의 악순환의 고리는 가진 자가 먼저 푸는 것이 순리라 생각된다. 미국이 세계의 최강자로서 빼앗긴 자의 아픔과 약자의 응어리에 귀기울이는 유연한 자세, 팔레스타인 문제를 하루 빨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만이 테러의 근거지를 약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응징이 될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이슬람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2001/09/14 오후 12:00:57
ⓒ 2001 OhmyNews
이런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 내부는 또 내부대로 썩어갔다. 이스라엘이 지원하는 술과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늘어만 갔다. 이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과 섹스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끄나풀이 되거나 정보원 노릇을 했다. 자신들의 조국이, 자신들의 형제가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판에.
여기서 나는 회교에 충실한 회교도의 정신 속에서 ‘성전’의 논리를 발견했다. 회교에서 가르치는 자기희생, 이건 바로 조국해방과 침략자 축출을 위한 투쟁 속의 ‘순교’였다. 신은 우리들의 희생을 허락할 것이며 결국 희생자들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나는 측근들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무장항쟁과 대중투쟁을 하나로 묶어 적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 그 결과, 1987년 하마스(회교저항운동)의 창설과 함께 역사적인 인티파다(봉기)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1987년 12월14일,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대형집회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메드 야신(Ahmed Yassin·하마스 최고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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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
팔레스타인의 땅과 성지를 강제로 점령한 채,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쫓아내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킨 이스라엘의 침략 앞에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대안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나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이래 오늘 2001년 4월까지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왔으나, 그동안 우리가 제의했던 어떤 형태의 대안이나 정책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추구해왔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은 모두 강자의 논리 앞에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모든 평화적인 노력은 온데간데 없이 내게 남은 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이 붙여준 ‘테러리스터’란 별명뿐이다.
테러리스터라? 이 ‘거룩한’ 별명이 내게 적합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난 김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 삶의 철학을 지배해온 것은 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일생을 ‘엄격’과 ‘관용’의 한가운데 지점을 따라 걸어온 온건주의자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그 지원세력들이 나를 ‘극단주의자’니 ‘근본주의자’니 또는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그 답은 간단하다. 불법 침략자에 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 내 개인만을 놓고 볼 때도, 나는 법적 권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침략해서 강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그 땅의 주인이다. 만약 외국의 군대가 한국을 침범해서 당신과 가족들을 쫓아냈다면? 그래서 당신은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는데, 누가 당신을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부른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조국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나를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고 불러야 옳은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나는 그 극단주의자니 테러리스터라는 칭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다.
누가 외적의 침입을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며 ‘관용’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침략했을 때,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터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부르고 있는가. 왜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쟁만 유독 국제사회에서는 테러리스터의 난동이라 불려야 하는가. 자유와 독립을 시민권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어떻게 이런 희한한 호칭을 팔레스타인에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다.
“누가 테러리스터고 누가 희생자인가.”
이 간단한 걸 구분하지 못하는 인류가 과연 그 복잡한
21세기의 평화 철학을 말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500만 팔레스타인 시민 가운데 400만명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에 의해 국외로 쫓겨난 이 현실이 아직도 부족해서?
아니면, 핵무기와 신경가스, 미사일과 최신예 폭격기를 지닌 이스라엘군 무장상태가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민에 비해 여전히 신통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국과 유럽은 이스라엘을 ‘희생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공격자를 희생자로 치켜세우고 희생자를 테러리스터라 부르는 이 일그러진 국제사회의 이성이 적어도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국제연합, 이것도 한통속이었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에 노예의 복종을 강요했을 뿐이다. 국제연합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국가들- 주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에 손찌검을 해왔는데, 유독 이스라엘만은 손을 보지
않았다. 국제연합의 모든 결정을 파기시켜온 그 이스라엘만은 온전하게 보호받아왔다는 말이다.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까무러칠 만큼 두들겨맞았던 이라크나 유고처럼 또는 리비아나 수단처럼 왜 이스라엘은 응징을 당하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길 때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징벌 대신 최신무기를 안겨주며 오늘날 이스라엘을 중동 최고무장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게 팔레스타인이 보는 국제사회의 ‘정의’, 바로 그 정확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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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어설픈 휴머니즘을 경계한다
2001.9.13.목요일
딴지 특별취재반
신의 도시에 엄청난 뇌성이 있을 것이고,
두 형제는 카오스로 인해 무너진다.
성채가 견디고 있음에도 위대한 지도자는 굴복하며
큰 도시가 불탈때 세번째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In the City of God there will be a great thunder
Two brothers torn apart by Chaos,
while the fortress endures, the great leader will succumb,
The third big war will begin when the big city is burning.
아아 두려운 일이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몇백년전에 했다는 예언이 2001년에 벌어지다니... 두 형제(쌍둥이빌딩)가 진짜로 무너졌으니 이제 3차대전이 시작되는가... 아아..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해외로 토낄 것인가, 예비군 군복을 다리며 차분한 마음으로 삶을 정리해볼 것인가, 아니면 사과나무 묘목이라도 얼른 사다가 심을 것인가....
그런데. 그거 아시남?
저 시는 개뻥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저 가짜 시는 사고 직후에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여 폭발적인 기세로 널리 알려진 이메일에 담겨 있던 내용으로,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뿐인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느니, 수뇌부는 다 알고 있었는데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조했다느니, 등등의 음모론도 미국에 팽배해 있다.
졸라 우습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미국넘들이 뭔 일만 생기면 노스트라다무스를 들먹이고, 각종 음모론과 미신이 난무한다. 사건 사고 많고 감춰진 성역이 많은 우리나라도 정감록이나 음모론으로 저렇게 난리치지는 않는다.
본우원, 엑스파일의 광팬이며 노스트라다무스 책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어봤고 달착륙 구라설은 남들보다 몇 년 일찍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냉혹한 국제질서에 어설픈 음모론이나 미신의 설 자리는 없다.
그럼 미국 국민들이 유치하고 의심많고 나약해서 저런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 국민들이 바보같아서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 자체가 그렇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는 말부터가 딱 그렇다.
선과 악의 이분법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진 그날 밤,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명, 그리고 자유 그 자체가 고의적이고 치명적인 테러로 공격받았습니다. [중략] 사악하고 비열한 테러행위로 수천의 생명이 갑자기 끝난 것입니다.
이러한 대량살상 행위는 우리 나라를 혼돈과 퇴보로 몰아 넣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합니다. 위대한 우리 국민은 위대한 국가를 지켜왔습니다. [중략]
미국이 공격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밝은 자유와 기회의 횃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빛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악함, 인간 본성 최고의 악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최고의 선으로 응답했습니다. 인명구조자들의 용기, 헌혈과 도움으로 낯선 사람들을 보살피는 따뜻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중략]
오늘밤 나는 슬픔에 잠긴 모든 이들, 자신의 세상이 파괴된 모든 어린이들, 안정과 안전을 위협받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23장 4절)" 모든 이들이 이 성경구철처럼 어떤 위대한 힘에 의해 위안받길 나는 기원합니다.
오늘은 모든 미국인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단호한 결의를 한 날입니다. 미국인들은 전에도 적을 물리쳐왔으며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린 누구도 이날을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 세계의 자유와 선과 정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Thank you. Good night and God bless America. (영어 전문보기)
한 마디로 줄이면 이렇게 되겠다. “자유와 기회와 선과 정의를 대변하는 미국이 악(evil)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미국이 공격받은 이유는, 미국이 가장 밝은 자유의 횃불이기 때문에 비문명과 야만세력의 음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절라 유치찬란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그냥 정치적인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주 감동적이고 비장하게.
미국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 이건 정말 부럽다. 솔직히 부럽다. 미국넘이 하나 다른 나라에 납치라도 당하면 미국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난리를 떤다. 자국민 보호, 이거 무서워서 다른 나라는 미국넘들 함부로 못 건드린다. 우리로선 열받는 일이긴 하지만 주한미군 범죄에 대처하는 그넘들의 짓거리를 보라.
그러나 또 동시에 그들의 우월감이 오만함으로 이어지도 한다. 이건 단순히 자기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고 힘이 세다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선”이다. 자유와 인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사도이며, 문명의 빛을 비문명에 전파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월감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며 이데올로기다. “람보”를 보면서 유치하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이 딱 그렇다. 미국 대중의 수준은 딱 그정도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세계 무력지배는 그 “미국 이데올로기”로 치장된다. 미국의 질서에 따르지 않으면 깡패국가 (rouge country)이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이고, 심지어는 악이니 반문명이니 하는 거의 종교적인 색채로 덧씌워진다. 부시가 연설에서 괜히 성경을 인용한 게 아니다. 미국에서 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손에 화염병을 든 과격분자에다, 자살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광신도들이며, 문명과 이성의 세계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그들은 광신도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에 못지 않게 미국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들이다.
물론 이번 비행기 테러와 같은 무차별 살상은 악이다. 그런 식의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고,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자동으로 미국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악과 싸우는 것은 또다른 악일 수도 있다. 아니 선이니 악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국제관계에서 뭔 의미가 있단 말인가?
누구의 휴머니즘인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번 테러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고 한다. 사람 만명 죽은 걸 고소해하면서 기뻐 날뛰는 게 제대로 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되어 20만명이 죽었을 때 우리 민족은 환호했다. 20만명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애들이 싸그리 죽어 자빠졌을 때, 그래서 일본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했을 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에서 춤을 췄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기뻐한 것과 한국인들이 그 당시 기뻐한 건 다른 문제라구?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1945년 이차대전 말미 독일의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연합군은 쑥대밭을 만들었다. 800대의 폭격기로 이틀간 흔적없이 밀어 버린 것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드레스덴을, 인구 35만 중 10만명을 죽이고 건물 몇 개 달랑 남을 정도로 허허벌판으로 밀어 버리면서, 노인과 여자와 애들만 바글바글한 아기자기한 도시 하나를 때려 부수면서 연합군 측과 국민들은 고소해했다. 독일의 자존심을 꺾어 버렸다면서. 군사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독일의 상징과 자존심을 꺾는 게 중요했을 뿐.
이번에 미국의 자존심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타겟이 된 것도 똑같은 이유였다.
독자제위나 본우원이나, 우리는 다같이 폭력에 분노한다. 처자식 먹여살리는 것, 출세하는 것 밖에는 관심도 없던 애꿎은 사람 일만명을 일거에 죽인 폭력에 분노하며, 단 10분 전까지도 퇴근 후 데이트할 궁리하던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뻔히 죽는 줄 알면서도 까마득한 아래로 우수수 뛰어내리게 만든, 그 엄청난 폭력에 전율을 느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던 비행기 승객들, 고단한 일상에 지친 그들을 선택의 여지없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힘에 분노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 분노의 대상은 누구인가? 분노의 똥침을 맞고 길바닥에서 게기적거리며 죽어자빠져야 할 인간은 누구인가?
20만을 죽인 핵폭탄에 분노한다고 해서 일본 편을 들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일본도 똑같이 핵폭탄을 개발중이었고, 미국이 아니었더라도 일본이 먼저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테러도 마찬가지다. 비행기 테러에 분노한다고 해서 무조건 미국 편에 설 수는 없다.
어설픈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칼기 폭파범 김현희에 대한 휴머니즘이 도대체 휴머니즘인가? 어설픈 휴머니즘은 오히려 거꾸로 폭력을 정당화할 할 수도 있다.
죽어간 미국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의 절반이라도 걸프전 때 죽어간 20만 이라크인들에게 느꼈더라면, 그 반의 반만이라도 지금까지 죽어간 1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쏟았더라면, 그리고 중동에 다시 전쟁의 불길을 지핀 부시 행정부에게 지금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분노했더라면, 오늘의 이 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
98년 미 대사관 테러에 대항해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의 제약공장을 모조리 때려부쉈다. 확인된 집계는 없지만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어느 누구나 다 자신의 정당성이 있다. 누구의 휴머니즘이 진정한 휴머니즘인가?
얼마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 한 명을 그가 앉아있는 빌딩 집무실로 헬기에서 미사일을 쏴 죽였다. 폭탄을 터뜨려 죽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미사일에 “맞아죽게” 했다. 그것을 미국과 한국의 언론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라고 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며 폭탄을 안고 돌진하는 것은 “자살테러”라 했다. 그때 그 언론 문구를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아랍의 테러세력들을 비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티비에서 스펙타클하게 죽어가는 미국인들에게 가지는 어설픈 휴머니즘은 지금까지 미국이 행사해 온, 혹은 미국이 앞으로 행사할, 더 엄청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폭력은 자신이 폭력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폭력은 언제나 휴머니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리고 때로는 “자유”와 “평화”와 “기회”와 “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저 위 부시의 연설처럼.
중동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본우원, 반미하자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아랍이라고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재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해서 본지는 지난기사에서 분명히 그 말도 안되는 학살행위를 규탄한 바 있다.
미국이냐 아랍이냐 둘중 한쪽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쪽이 악이라고 다른쪽이 선이라는 유치한 이분법을 써먹는 데는 우리나라에 딱 두 군데밖에 없다. 어린이용 만화영화, 그리고 빨갱이를 증오하는 좃선일보.
하고 싶었던 말은, 티비와 신문을 보면 온통 우리 눈을 뒤덮는 그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 입이 떡 벌어지는 그 장면들에 너무 지나치게 경도되지 말자는 것이다. 뜨거운 가슴이 휴머니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 왜냐하면 이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로 미국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도 고통을 받을 것이고, 남북관계도 앞으로 어떻게 꼬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과 아랍의 관계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태의 계기가 된 부시의 안하무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발언할 권리가 있고, 중동문제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에 너무나 무지하다. 중동문제 전문가 이름 한 사람만 대 보라. 이런 거에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정치인 이름 한 사람이라도 대 보라. 우리는 왜 이리 폐쇄적이고 폭이 좁은가?
CNN만을 주구장창 내보내는 티비, 친미 친유대 일변도인 우리나라 언론은 대한민국의 국익을 해치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가 남의나라 미국의 꼴통짓에 덩달아 날뛰고 그 피해를 봐야 하는가? 사고 후 뉴욕 맨하탄에서는 유태인들이 공공연히 자기네 빵떡모자를 쓰고 삼삼오오 거리를 몰려다닌다는 본지 통신원의 소식이 들어오고 있다. 미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유태인들이 꽉 잡고 있는 나라이고, 유태인들의 폐쇄성은 한민족을 뺨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이제 어디라도 애꿎은 희생물을 타겟삼아 폭탄을 쎄려부을지도 모른다. 기울어져가고 있는 미국 경제의 타개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보복과 응징이라는 명분 아래. 왜 우리가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춰야 하는가?
(주 -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이번 테러의 상관관계, 전쟁과 미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다 다룰테니 좀 기둘려 보시라)
또하나, 한 나라가 강경 우익으로 치달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목하 목도하고 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이다. 우익의 목소리가 균형있게 드러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이 강경 일변도로 나갈 때, 한 나라를 강경 우파들이 좌지우지 할 때.... 지나치게 강한 것은 부러진다는 거, 동서고금의 진리 아니겠남?
좃선을 비롯한 재래 언론들이 “깡패국가 테러국가 북한을 더 옭죄어야 한다”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허긴, 남북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꼴통 우익들이 비판받으면 비판받을수록, “우리끼리 좌우대립이 격화되어 냉전이 심해지고 있다”고 써제끼는 넘들이니 별 기대는 않는다만, 이래도 배우는 게 없다면 걔네들은.... 구제불능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가족들 때매 철렁했던
딴지 편집장 최내현 (asever@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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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응어리가 대체 무엇이길래
미국 테러당할 때 일부 아랍인은 왜 환호했나
이희수 기자 ohmynews@ohmynews.com
레바논 남부에 거점을 둔 하마스 본부에는 항상 자살특공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폭탄을 안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이 몰려들고 있다. 단순한 종교적 광신일까? 무지몽매한 자들의 야만성일까?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미국심장부에 대한 항공기 폭파 테러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일까? 왜 그들은 미국을 향해 그렇게 무모한 도발을 계속 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응어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반미 응어리의 태동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땅에 '위대한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아랍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2천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들의 승리에 세계는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 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분노했다. 그리고 조국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2천년간 평화롭게 살아온 조상들의 땀과 피가 어린 땅이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한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정책은 유럽인들의 죄과였다. 그런데 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질렀던 죄의 대가를, 아무런 인과관계나 역사적 책임이 없는 아랍인들이 대신 치르도록 했는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을 향한 지울 수 없는 응징의 원한이 뿌리를 내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힘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때부터 오히려 자신들이 난민이 되어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한 가지,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꿈은 산산조각나 버렸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고토 회복은커녕, 기존의 아랍 영토마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 지역의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를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지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해 왔기 때문이다.
현실과 타협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이미 이스라엘이 핵을 가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현실에서 조국을 되찾는 꿈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중재하여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점령한 땅에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수립해주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신 팔레스타인은 헌법을 바꿔 이스라엘 탈환을 포기하게 하고 국가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지난 50년간 조국 되찾기에 헌신했던 많은 강경 세력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현실정치를 받아들인 대다수 온건 아랍인들을 이 길을 선택했다. 전쟁에 지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양보이고 생존의 게임이었다.
그것이 1993년의 오슬로 평화혁명이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국제사회는 모처럼의 화해와 공존의 틀에 박수를 보냈고 그 당사자들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희망의 포기
그러나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서 일부 팔레스타인 반대세력들의 테러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강경 정권은 자국안보를 들어 평화협정 자체를 무력화시켜버렸다. 나아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통해 자국 영토화를 꾀하고 군대를 동원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꿈을 무산시켜 버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부시 정권은 미사일과 팬텀기를 동원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지원하거나 수수방관했다. 평화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듯이 보였다.
최근에는 조직적인 요인암살 계획에 따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지도자를 포함한 강경파 지도자들이 차례로 사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이 시온주의를 인종차별 이념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열의를 무시하고 미국은 남아공의 더반에서 열린 인종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이슬람권에게 극도의 불신감과 배신감을 심어주었다.
겉으로는 세계평화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일방적 가치를 강요하고 이중잣대로 이슬람세계를 유린하는 미국에게 강경파들은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했다.
무장된 테러와 몸을 던지는 테러 사이에서
그들은 분노했다. 기회와 선택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려온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목숨을 내놓았다. 항공기를 몰고 미국을 향해 응징의 도전을 한 셈이다.
하지만 리비아, 이란 같은 반미국가는 물론 지하드, 하마스, 헤즈볼라 같은 과격 이슬람단체들도 한결같이 미국에 대한 이번 테러를 비난했다.
그들은 왜 스스로 테러를 행하면서 왜 이번 테러를 동시에 비난해야 하는가? 그것은 민간인을 담보로 한 테러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비난받아야 할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전투기를 동원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민간인 학살도, 국가 테러로 규정하면서 중지되거나 응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 이들은 미국이 일관된 정책과 모두에게 공유되는 가치기준을 적용하기를 원한다.
핵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핵사찰의 예외임을 묵인하면서 적대관계에 있는 인근 아랍국가들의 자위 개념의 핵 시설은 물론 사소한 화학무기 프로젝트까지 철저히 파괴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아랍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던지는 절규
무고한 미국 시민들이 희생당한 참혹한 테러현장에서 서방세계가 경악하고 분노와 슬픔을 보이고 있을 때, 아랍전사들은 지난 50년간 이스라엘의 테러로 숨진 수만 명의 형제와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있다. 그러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미국 시민들의 아픔을 아랍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의 매일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랍인들의 일반적인 성향이 반미를 깊이 깔고 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과격 테러리스트 집단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절대다수는 폭력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갈구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한, 대립보다는 화해를 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의 과도한 보복공격이나 엄청난 민간인의 희생이 따르는 폭격은 또 다른 테러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테러의 악순환의 고리는 가진 자가 먼저 푸는 것이 순리라 생각된다. 미국이 세계의 최강자로서 빼앗긴 자의 아픔과 약자의 응어리에 귀기울이는 유연한 자세, 팔레스타인 문제를 하루 빨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만이 테러의 근거지를 약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응징이 될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이슬람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2001/09/14 오후 12: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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